우리에게 ‘샌타페이’란 지명이 익숙해진 것은 일본 여배우 미야자와 리에 누드 사진집 ‘산타페(Santa Fe)’의 영향이 컸다. 리에가 열아홉 살에 미국 뉴멕시코 주 샌타페이에서 찍은 이 사진집은 1991년 출간 직후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실제로 샌타페이에 가 보면 ‘옷을 벗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여기서 옷은 단지 몸을 두르고 있는 천이 아니다. ‘미국의 마지막 히피 도시’라는 명성답게 자연스럽고 편안한 분위기의 이 예술인 도시에서는 각자 떠나온 곳에서 입었던 ‘옷’이 도시에서 뒤집어쓴 가면과 허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환하지만 강하지는 않은 햇살, 코발트색 아크릴 물감을 풀어 놓은 듯 짙푸르고 맑은 하늘이 그림의 문외한이라도 캔버스와 붓을 들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게 한다. 수천 년을 이어 온 인디언 문화가 지층을 이루는 이곳에는 좁은 골목 한 집 걸러 하나씩 박물관, 미술관, 갤러리들과 정교한 수공예품을 파는 구멍가게들이 즐비하다.
허름한 폐광촌이었던 이곳이 예술인 도시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미국 현대미술의 거장인 여류화가 조지아 오키프(1887∼1986) 덕분. 20세기 미국 미술계의 독보적 존재로 추앙받는 오키프는 1917년 기차여행 때 이곳을 만난 뒤 매년 여름을 이곳에서 보내다 62세 때인 1949년부터는 아예 정착해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그녀의 강렬한 파스텔 톤의 꽃그림들은 이곳 거주를 기점으로 샌타페이 풍경화와 뼈, 식물기관, 조개껍데기, 산 등 자연물에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그림들로 변모한다.
지난주 기자가 찾은 오키프 미술관(www.okeeffemuseum.org)은 평일인데도 관람객들로 붐볐다. 1997년 한 독지가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이 미술관은 불과 70여 점이 전시되어 있는 작은 공간이지만, 매년 여러 나라에서 온 17만여 명이 찾는다고 한다.
바버라 불러 오키프 미술관장은 “떠들썩한 문화행사를 하거나 예술가를 상품화해 떠들썩하게 알리기보다, 위대한 예술가의 영혼을 공유하는 ‘정신적인 공간’으로 만드는 데 주민과 시 당국이 노력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시는 건물 신축, 증개축을 엄격히 통제하고 흙집(어도비)이라는 건축 전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곳곳이 벽화로 장식되어 있는 거리에는 대규모 쇼핑센터나 요란한 간판의 패스트푸드점은 보이지 않는다.
독특한 풍광의 샌타페이 거리를 걷다 보면, 세계적인 예술가나 마을을 낳지 못하는 우리 현실이 안타깝게 여겨지기보다, ‘그렇다면 남이 갖지 못하는 우리만의 색깔은 무엇일까’ 하는 상념에 젖게 된다.
<샌타페이=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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