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윽고 오후 5시 경매 시작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자 3명의 경매사가 단상에 올랐다. 경매에 나온 작품 이미지가 화상으로 뜨고 그 위 전광판에는 시가(始價)가 떴다. 작품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끝나고 호가가 시작되자 응찰자들이 번호가 쓰인 팻말을 들어 응찰의사를 표시했다. 옆 테이블 전화기에도 불이 붙었다. 현장에 오지 못하거나 VIP룸에서 경매 생중계를 지켜보는 전화 응찰자들 때문이다.
고미술품, 와인, 시계, 자동차 경매까지 지나고 드디어 93번째 작품으로 박수근의 ‘거리’가 등장했다. 경매장이 약간 술렁거렸다. 시가는 6억3000만원. 6억9000만원까지 호가가 됐다. “자, 더 없으십니까, 없으십니까?”
경매사가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과연 낙찰될 것인가. 그러나 더 이상 응찰자가 나서질 않았다. 소장자가 원했던 최저 낙찰가 7억원을 넘지 못해 결국 ‘거리’는 유찰되었다.
이날 행사에 나온 100여점 미술품의 낙찰률은 41%. 낙찰 총액은 15억7000만원이었다. 작품 하나가 낙찰되는 평균 시간은 약 5분. 그 사이에 작게는 수십만원, 많게는 수억원의 돈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뜻밖에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예 글씨 ‘개척과 전진’이었다. 2000만원에서 시작돼 마지막까지 남은 두 사람의 응찰자가 경쟁을 벌이다가 결국 6300만원에 낙찰되었다. ‘박근혜 효과’가 경매장에까지 미친 것 아니냐는 농들이 흘러나왔다.
한편 서양화가 고영훈씨(52)의 유화 ‘돌’이 2500만원에서 시작해 3700만원에 팔려 작고 작가 위주였던 경매장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①] “비효율이 비도덕이다” | 2020-12-03 |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②] “정신 안 차리면 구한말 온다” | 2020-12-03 |
[로비에서] 박수근은 유찰… 박정희는 낙찰 | 2004-05-01 |
[미술시장 긴급진단] <下> 미술시장 살리려면 | 2004-03-27 |
[미술시장 긴급진단] <中> 시장 구조 문제 없나 | 2004-03-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