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년 지나도 후손 아직도 가난에 허덕 / UR파고 헤치고 농민대접 받았으면
새해 갑술년은 동학혁명(1894년)이 일어난지 1백주년이 되는 해. 전봉준 손화중과 함께 동학혁명의 3대 지도자로 꼽히는 김개남장군의 3대 장손 김환옥옹(75)과 4대손 상기씨(46)는 고향인 전북 정읍군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마을을 지키며 농사를 짓고 있다.
『먹고 살기 바빠 개남할아버지까지 챙길 틈이 없었구만. 농민들 살기좋은 세상 만들겠다고 할아버지가 목숨까지 바쳤건만 1백년이 지난 오늘까지 이 손자는 가난에서 못헤어나고 있으니 영 면목이 없어』
땅 환뙈기 없이 매년 소작만 30여마지기를 한다는 김옹은 특히 올해가 유난히 넘기기 힘들다며 연신 한숨섞인 줄담배를 피워물었다.
『예년 같으면 1백가마 정도는 거뒀는데 냉해 때문에 40가마 밖에 못거뒀다네』 그는 지난해 농협에서 지원해 준 1천5백만원으로 산 소 10마리도 수입개방 여파로 값이 절반으로 떨어져 인건비는 커녕 사료값도 못 챙겼다고 털어놨다.
『당장 도시에서 공부하는 손자들 등록금을 마련키 위해 내년부터 농사짓는 것을 그만두고 막일을 하겠다는 맏아들을 말리지 못하겠구먼』 김옹은 옆에 앉아있던 아들 상기씨를 근심어린 눈으로 건너 다 보았다.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가던 할머니가 「네 할애비가 병사들 먹여 살리느라 우리집이 망해 너희들이 배 곯는다」며 주린배를 쓰다듬곤 했었지』
김개남장군의 외아들(백술·지난 52년 작고)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역적 집안이라고 숨도 못 쉬고 살았는데 이제보니 전 장군하고 우리 할아버지가 세상을 쥐락펴락했는 개벼』라며 어릴적 할머니 무릎맡에서 할아버지 얘기를 듣고 자랐다고 말했다.
그는 박정희대통령 시절에 동학제를 한다고 가봤더니 꾸어온 보릿자루 취급하고 수건하나 쩔러주면서 뭐 얻어먹으러 온 사람처럼 박대하길래 아예 발길을 끊었다고 말했다.
김옹은 14세 나던 해(1933년) 집안 어른들이 「재앙거리」라며 마당에서 할아버지 책을 태우던 일이 『할아버지한테 제일 죄스러웠던 일』이라고 회상하면서 『할아버지가 이렇게 대접받을 줄 알았다면 몇 권 남겨놓을 것을 그랬다』고 아쉬워했다.
<정주=허문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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