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국한 뒤 막노동 등 갖은 고생/사망 나흘 만에 아파트서 발견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임시정부 선열 5위의 봉환안장식이 거행되던 10일 오전 서울 강서구 화곡동 강서성모병원 영안실에는 한 독립투사의 빈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광복군 지하공작원으로 활동한 김광언옹(75·서울 양천구 목동 목동아파트 611동708호)의 빈소다.
아파트에서 혼자 살아온 김옹은 숨진지 나흘만인 9일 오후 자택 거실에서 심하게 부패된 상태로 발견됐다.
외아들 만성씨(34·회사원·경남 거제)는 『지난 5일 오후 아버지와 통화를 한 이후 7일 다시 전화를 했으나 받지않아 휴가를 내 집에 와보니 아버지가 그만…』이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3·1운동 나던 해인 1919년 금광을 캐던 부유한 집안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김옹은 「나라를 빼앗긴 민족이 어떻게 더운 밥을 먹으며 따뜻한 이불속에서 잠을 잘수 있느냐」며 18세에 만주로 건너갔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매형과 함께 활동하던 그는 24세때인 43년 3월부터 화북지구 광복군 지하공작원으로 활약했다.
광복군 3지대 지대장공작대장을 맡아 백범선생을 도와 일하던 그는 해방후 공적이 인정돼 77년 건국포장,8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기도 했다.
해방이듬해 귀국,그동안 막노동 쌀장수 등 갖은 고생을 했다. 김옹은 광복군 동지회 부회장을 지냈다.
『고인은 불우하게 사는 옛동지들을 찾아다니느라 매달 70만원씩 나오는 연금도 혼자쓰는 법이 없었어요』 김국주 한국광복군 동지회 회장(70)의 말이다.
지난 86년 보훈처로부터 2천만원에 특별분양받은 아파트에서 손수 밥과 빨래를 하며 혼자 생활했다는 김옹은 『지방에 있는 자식들(1남4녀)이 같은 살자고 떼를 썼지만 동지들이 있는 서울이 좋다』며 거절해 왔다는 것. 고인은 순국선열 5위의 유해가 안장된 국립묘지에 묻힌다.6069363
<허문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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