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남북이산가족 상봉자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상봉 후유증’으로 고통 받고 있다. 추석이 다가오면서 그 정도가 더욱 심해지고 있다. 상봉한 지 한달 가까이 되지만 50년 만에 만난 가족들 모습이 사진처럼 선명하고 만나기 전 그리움은 회한과 아쉬움으로 변해 가슴을 짓누른다.
남으로 내려온 가족을 만난 사람들보다 북으로 올라가 가족을 만난 실향민들의 허탈감과 후유증이 더 심한 편. 북한의 실상과 가족들의 초라한 모습을 직접 눈으로 봤기 때문이다.
“딸애한테 내 입던 옷까지 벗어 주고 왔어. 서울에서 듣던 것보다 사는 형편이 더 안 좋은 것 같아 마음이 아픈데 추석이라고 뭐 하나 도와줄 수도 없고. 말하는데도 왜 그리 남 눈치를 보던지….”
세 살 때 헤어진 딸과 세 동생을 만나고 돌아온 김성옥씨(72·여·대전 중구 중촌동)는 “북의 가족들 얼굴이 꿈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며 “동생들 얼굴이 나보다 더 늙어 보여 가슴 한 쪽에 뭐가 걸린 듯 늘 답답하다”고 말했다.
북의 아내 송두옥씨(75)를 만나고 온 최경길씨(79·경기 평택시)도 심한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며느리 문정숙씨(49)는 “아버님이 북에 다녀오신 뒤 말수가 많이 줄었고 음식도 잘 못 드신다”며 “어머님의 고왔던 얼굴이 너무 상했다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혼잣말을 하시곤 한다”고 전했다.
북에서 온 가족을 만난 상봉자들도 정도가 다를 뿐 사정은 비슷하다. 오빠 이내성씨(68)를 만난 KBS 아나운서 이지연씨(53)는 상봉 후 ‘바람이 빠진 공’처럼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져 있다고 고백했다.
“북한사람이 이제 ‘동포’가 아니라 ‘가족’으로 다가옵니다. 태풍이 지나간다는 뉴스가 나오면 잠을 못 자고 며칠 전 북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일행의 미국 방문이 무산됐다는 소식에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어요.”
이씨는 “오빠가 북에서 성공해 잘 살고 있는 것을 확인했는데도 명절이 다가오니 ‘함께 제사도 못 지내나…’하는 아쉬움으로 가슴이 더욱 아프다”고 말했다.
강북삼성병원 신경정신과 신영철과장은 “좋은 일이라도 충격이 올 경우 스트레스가 된다”며 “지나친 감정 표현이나 극도의 절제보다는 자연스럽게 감정 표현을 할 수 있도록 주위 사람들의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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